감독: 정지영 | 출연: 염혜란 (정순), 신우빈 (영옥), 유준상 (어른 영옥) 개봉일: 2026년 4월 15일 | 배급: CJ CGV / 와이드릴리즈 장르: 미스터리 드라마 |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 공식 초청작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역사적 아픔을 다룬 영화들을 보고 나면 한동안 일상으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접근 방식이 예상과 달랐습니다. 4.3이라는 비극을 정면으로 고발하는 대신, '이름'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소재를 통해 그 역사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는 것.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가 바로 거기 있을 것 같았습니다. 4월 15일 개봉이 벌써부터 무겁고도 기대됩니다.
이야기의 출발은 현재입니다. 고등학생 영옥(신우빈)은 자신의 이름이 싫습니다. 여자 같고 촌스럽다며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 그 이름을 지어준 엄마 정순(염혜란)은 나이 60이 다 돼가는데도 8살 이전의 기억이 전혀 없고, 바람이 불고 햇볕이 강한 날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발작을 일으킵니다. 영옥이 엄마의 과거를 찾아가면서, 그 이름 뒤에 숨겨진 50년 전 제주의 약속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이름'이라는 소재가 이토록 영리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싶은 아이와, 그 이름을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어머니 사이의 거리감이 사실은 망각과 기억 사이의 거리였다는 것, 그리고 그 망각이 개인의 의지가 아닌 역사의 폭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는 사실이 서서히 밝혀지는 구조가 예고편 하나로도 충분히 전달됩니다.

더 글로리, 마스크걸을 통해 전 세계 관객과 만난 염혜란이 이번에는 50년의 비밀을 몸속에 가두고 살아온 어머니를 연기합니다. 이 배우가 가진 가장 큰 힘은 '말하지 않음'의 무게를 화면에 새기는 능력입니다. 눈빛 하나로 감추고 있는 것들의 크기를 짐작하게 만드는 그 연기가, 기억을 잃은 채 살아온 정순이라는 인물과 만났을 때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 베를린에서 이미 현지 관객들이 그 답을 먼저 확인했다는 사실이 부럽습니다. 신인 신우빈의 첫 주연이라는 점도 기대를 높입니다. 첫 주연작으로 베를린의 선택을 받은 배우가 스크린에서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 그 자체가 이 영화의 또 다른 볼거리입니다.
베를린영화제 측은 이 영화에 대해 "비극적인 역사가 남긴 침묵을 깨는 경이로운 작업이자, 치밀하게 구축된 서사와 강력한 감정적 울림을 가진 작품"이라는 찬사를 남겼습니다. 국내 관객보다 전 세계 영화인들이 먼저 이 영화를 본 셈인데, 제주 4.3이라는 한국의 역사적 비극을 전혀 모르는 관객들에게도 이 이야기가 가닿았다는 사실이 이 영화의 보편성을 증명합니다. 역사 영화라는 선입견 없이 '어머니와 아이의 이야기'로 접근해도 충분히 울림이 있는 영화일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무거운 영화일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 남을 영화일 것입니다. 정지영 감독이 부러진 화살, 블랙머니 등에서 보여온 묵직한 사회적 시선이 이번에는 역사와 가족이라는 두 개의 축 위에 놓였습니다. 4월의 극장가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깊이 남을 영화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가볍게 즐기러 가는 영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꼭 봐야 할 영화라는 확신은 이미 있습니다.